일본은 절대 한국에 사과하지 않는다.
현대사는 무자격자들이 호가호위한 역사
- 청산없는 민간인 학살을 비판한다
기행문, '걷는자의 꿈, 존 뮤어 트레일'을 읽게 된것은 미국 자연의 거대함, 상상 이상이라는걸 깨닫게 되면서다. 길은 미국 서부, 4천킬로나 된다. 멕시코에서 시작하여 캐나다에서 끝이 난다. 저자는 20여일 동안 이 길의 일부를 걷는다. 400Km. 숲 깊숙한 곳에서 온종일 걷기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하지만 난 이 부럽기만 한 여행에 앞서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먼저 말하고 싶다. 1942년 미국 어느 산자락에 세워졌던 강제수용소 이야기다.
국가 폭력의 흔적, 만자나수용소
헐리우드 영화 '굿나잇 앤 굿럭', '트럼보'는 미국에 빨갱이 사냥 광풍이 불던 1950년대를 그리고 있다. 미국 전체가 상원의원 매카시의 주장에 미쳐있던 그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렸다. 그들은 이웃과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했고 오랜기간 감옥에 갖히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미국은 오로지 사상이 자유롭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구속했다.
한 10년쯤 앞서서는 더 기가 막힌 일도 있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미국 정부는 일련의 조치를 내렸다. 루즈벨트는 미국 전역에서 미국인으로 살고 있는 일본출신 미국인 12만명을 '만자나 수용소'에 강제 이주시킨다. 이주는 1942년 3월 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인임이 분명한 미국시민들은 시에라네바다 산자락에 갖혔다. 억압에 의해 꼼짝없이 갖힌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보며 기막힌 하루를 보내야 했다. 강제수용의 부작용은 컸다. 1944년 폐쇄전까지 적지 않은 희생자가 생겨났다. 1988년 레이건 정부는 이들에게 (턱없지만) 2만 달러의 형식적 보상을 하게 된다. 미국 정부가 자국민이자 미국인이 분명했던 만자나 수용 피해자들에 사과한 것이다.
미국 정부가 미국인을 적으로 삼고 폭력적으로 가두었던 이 만자나 수용소 이야기는 하필이면 내가 오랜전부터 분노하며 무척이나 민감해하던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떠올리게 하였다.
법은 엿장수맘대로요 개나발이니 없다 치자. 폭력은 무조건 적인 학살로 나타났다. 평범한 양민이 국가에 의하여 맥없이 죽임을 당했다면 그에게 있어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국가폭력. 그 폭력이 인명을 끊었다면 용서 할 수 없는 일이다. 개별적 사건에서 단 하나의 지나침도 문제가 될 판인데, 집단을 향한 무차별적 폭력, 그리고 합리적이지 못한 이유와 행위였다면 더욱 용서 할 수 없는 일인거다. 이것은 그 어떤 이유로든 주체가 누구였든 어떤 명분이었든 분명한 야만이다. 한국 전쟁 전후로 나타난 국가폭력은 우리가 인간으로 살기위해 힘들게 유지해온 심연을 철저히 파괴했다.
자신들과 생각을 다르게 품는다고 하여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정당 한까? 그건 문명국에서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은 같은 민족의 대표로써 단지 위임을 받은것에 불과한 한 정치 권력자가 자신의 정권안보를 위하여 통치를 빙자하며 집단살인을 저지른 행위다. 이 시기 국가권력을 동원한 민간인 학살은 우리 현대사 중 최악의 비극으로 제대로 청산된 바가 없다. 우선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반드시 청산해야 할 민족적 문제임에도.
국가가 자국민을 강제로 이주시킨 미국 만자나 강제수용 사건은 국민을 스파이로 몰거나 범죄자로 단정하고 국가폭력을 동원하여 강제적 수단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국가가 민간인을 절차에 의하지 않고 초법적으로 생명을 살해한 일는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재판받지 아니하고 처벌 될 수 없는' 국민의 기본권을 극단적으로 침해한 행위다.
이승만은 절차없이 자국민을 대량으로 학살하고도 슬퍼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았다. 그는 죽을때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심지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이승만 추종자집단에 의하여 여전히 희생자 그들은 죽어야 할 사람으로 불려지고 있다.
한국전쟁 전 후, 국가에 의한 민간인 학살
한국의 제노사이드는 세계사에서 주목받지 못한 탓에 제때에 알려지지 못했다. 이승만의 나라, 국가의 광기는 무서울 정도였다. 헤아릴 수 없는 원혼이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억울함이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학살이 있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정의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국가를 비웃게 만든 일이었다.
법은 작용하지 않았다. 이성마저 없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전 후로 수많은 사람들을 재판없이 처형하였다. 두 말이 필요 없다. 셀 수 없는 논문, 기록, 조사보고서가 이를 입증한다. 과거 민주정부가 세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한 수백건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살펴보면 머리가 혼미 해질 정도다. 이 헤아릴 수 없는 학살 조사 보고서를 보며 난 피가 끓었다. 조사나 수집은 한정적 일 수 밖에 없으니 실제 학살은 이 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난 7, 80년대 운동권의 심정을 이해한다. 그들은 작게는 청산되지 못한 이런 국가의 배신만으로도 미제타도나 독재타도를 충분히 외칠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빨리뛰던 맥박은 결국 느려져야 했다. 이 폭력앞에서 무기력한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학살은 존재했고 청산되지 못했다. 청산되지 못했으니 교훈도 없다. 무조건적 반공교육에 침전된 한국사회의 대중적 지성만으로는 금기시되는걸 막지 못했다. 정의가 가늘게 숨쉬며 사전속에서 이름만 이어가고 있는데도 사회는 핑계와 이유를 대며 분노하지 못했다.
명백한 국가폭력이자 국민학살이었다. 양민이 빨갱이로 누명 씌워져 칼에 베이고 찔리고 총을 맞았다. '우리는 무덤위에 서있다.' 《대한민국史》의 저자 한홍구교수의 표현은 몸서리 칠 정도로 구체적이다. 학살은 전국에서 벌어졌다. 국민보도연맹사건은 기가 막힐 지경이다. 국가가 어떻게 자국민의 목숨을 가볍게 해칠 수 있을까.
제주만 해도 1947년 이후 7년간 최소 2만명이 국가 폭력에 의하여 학살되었다. 한국전쟁중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의해 살해 당했다. 국가는 예비검속이라는 법령에 나오지 않는 구실로도 사람을 가볍게 죽였다. 한국전쟁 전 후로 학계에서는 많게는 백만의 인명이 국가폭력으로 끔찍하게 죽어간 것으로 보고있다. 국가는 학살을 주도했거나 적극 방조했다.
[참고]
4.3평화재단-구술기록
김관후 4.3 컬럼 (~2016.4.25까지, 63편)
프레시안 연재-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다양하고 많은 사실들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해방직 후 김구 등과 같은 실질적 독립운동인사나 유능한 인물등에 비하여, 정치적 경쟁을 통해 정권을 획득하기에는 실로 초라했던 이승만이 이러한 학살 행위를 권력토대 선점이나 정권안보에 악용했다고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의 유일한 정책은 반공이었다. 미국은 철저히 이승만을 이용했고, 이승만은 철저히 미국에 기댔다. 독립적인 자아의식을 가지고 진정한 애민 사상을 가진 정치적 인물들은 암살당하거나 후손들 까지 고초를 이어가야 했다.
해방전 일본에 부역하여 친일파로 호위호가하다가 해방이 되자 이승만에 의하여 기용된 친일 잔챙이들이 행한 학살 죄악상은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경남도민일보의 임종금 기자가 펴낸 《대한민국 악인열전》을 펼쳐보면 한 순간 말문이 닫히게 된다. 국민의 이름으로 처형되어야 했을 악인들을 이승만은 이른바 반민특위를 무산시킴으로써 살려냈다. 그리고 그들을 왼편과 오른편에 앉혀 최측근 등으로 기용했다. 당시로써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거나 현대식 훈련을 받은 사람이 없었으니 이들을 기용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기막힌 구실을 대면서. 이들 청산되지 못한 기회주의적 친일집단은 민족의 자존심에 치명적 상처를 주게 된다. 아니 이것은 타국으로 하여금 우리 민족을 우습게 보도록 만든 일이었다.
일본이 사과하지 않는 이유
국가 권력을 멋대로 휘두른 자들, 그들의 청산이 이루어졌다면 그 누가 우릴 함부로 보겠나. 해방 직후 친일 악질 부역자였던 그들의 목을 단숨에 잘라버렸더라면 어디 감히 군인이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을 수 있었겠나. 청산없는 과거는 왜곡된 형태로 흘러 올 수 밖에 없었다. 매국과 학살과 반역의 주체들이 정당화되거나 심지어 있었던 사실마저 부인되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없는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해놓고도 공과 타령으로 그추앙되는 이 넋나간 주장은 온전한 정신으로는 해석이 불가하다. 청산이란 단어를 잊은 민족에게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얼이 빠졌나. 정치인이 당연히 해야 하는 행위를 공이라 부르것은 그렇다치고, 정말 제 모가지 잘려나갔어도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든가 어쩔 수 없었다느니 따위의 주장을 할 수 있을까 말이다.
청산 해본바 없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과거 민주정부가 들어셨을때 일부사건에 대하여 국가는 조사 과정을 거쳐 사과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니 국가의 태도는 달라졌다. 심지어 주권자이면서도 국가에 의하여 목숨을 빼앗긴 피해자들은 반세기도 더 흘렀지만 여전히 권력 나부랭이들에 의하여 마땅이 죽어야 할 사람으로 가벼히 불려지고 있다. 이런 판국에 일본으로 부터 사과받고 싶다구? 엎드려 기는 그들을 보고 싶다구?
청산없는 역사의 흐름, 이런 속내를 일본 저들이 모를것 같나? 이런 난장이 전개되어가고 있는 처지에, 순수한 마음으로 일본정부에게 과거사 사과를 요구하고 또한 기대하는 것이 저들이 보기에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일이겠나. 이건 자존심의 문제이고 국가와 국민사이에 작용하는 원칙의 문제이다. 대관절 자기나라 국민에게 조차 사과하지 않는 부실한 국가에 그 어떤 나라 정부가 사과하고 싶겠나.
당장 대일 피해에 대한 사과를 기대하는 일보다 더 심각히 기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 정부의 민간인 학살 행위에 대한 분명하고도 뚜렸한 공식 입장과 후속조치를 기대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게 가능하겠나. 제 집 아파트값 유지에 열을 내고, 제 아이들 기죽이지 않겠다고 경쟁판으로 모는데 집요한 관심을 보이는 이 불쌍한 동포들의 늘어진 분위기로?
사과는 상대가 가치 있는 존재 일때 하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청산되지 못한 친일의 후예가 한국의 정치 사회 경제를 이른바 좌우하고 있는 상황에 저들이 사과하고 싶겠나? 일본은 절대 한국에 사과 하지 않을 것이다. 장담하건데 이런식이라면 어쩌면 영원히.
그리하여 시간은 이제 혼령들의 소리마저 뭍으려 할 것이고, 아파트값 동향 보다 더 구실 못하는 당대 백성들의 정의는 역활 없이 흘러갈 것이다. 역사학자 베네데토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 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그의 말은 통하지 않는다.
이런 사정을 너무나 잘아는 일본은 절대 한국에 사과하지 않는다.